준비됐나요~

-
수몰버스
...
몸이 얕게 흔들리는 감각과 함께 불현듯 꺼져있던 정신이 맞붙습니다.
아무래도 버스 안에서 깜빡 잠들어버렸던 모양이에요.
눈을 뜨면 들어오는 풍경은 익숙하고도 평범한 버스의 내부.
흔들리는 손잡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차창 너머의 풍경, 조금 낡은 감이 있는 앞좌석의 시트….
익숙한 것들 투성이인 차체의 내부에서 익숙하지 않은 점이라고는...
버스가 텅 비어있다는 점 뿐입니다.

그야말로 '나 자신'을 제외한 탑승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왜일까요. 별로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적적한 버스를 오로지 시선만으로 훑고 있었을 때였나요.
문득 좌석의 맞은 편 정면에 붙어있는 버스 번호 라벨이 눈에 들어옵니다.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62 |
판정결과: | 실패 |
그러니까...잘은 보이지 않습니다. 앞머리를 조금 걷어냈어야 했나요?
어디...0418번인가?
이 버스는 아무래도 종점까지 우회해서 가는 번호의 버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탑승객이 없을 법도 하지요. 불안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쯤 왔지? 그 전에 목적지가 어디였더라….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다보면 문득 기대고 있던 차창 너머로 시선이 돌아갑니다.
흔들리는 창문 너머로 어느새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꼭, 세상을 수몰시킬 것처럼.
이 비는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걸까요?
잠들기 전까지만해도 날씨가 제법 맑았던 것 같은데…
지능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5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글쎄요, 정말 잠들기 전까지만해도 날씨가 맑았던가요?
문득 부자연스러운 위화감에 사로잡힙니다.
그야 잠들기 전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언제 이 버스에 올라타 있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마치 검은 도화지 위에 먹칠을 한 듯,
머릿속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뿌옇고 흐릿한 기억만이 잔존합니다.
SANc 0/1.

기준치: | 40/20/8 |
굴림: | 2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성치 감소 없음.
덜컹.
어지러운 머리를 갈무리 하기도 전에, 방지턱 탓인지 버스가 또 한 번 크게 흔들립니다.
그 불친절한 진동과 함께 품에 안고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국화 꽃다발이, 버스 바닥을 나뒹굽니다.
품에 안고 있던 무언가는 아무래도 국화 꽃다발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군 충격 탓이었을까요?
순백색의 꽃잎 몇송이가 바닥에 흐드러진 것이 보입니다.
저런...주워들까요?

바닥에 나뒹구는 꽃다발을 주워들던 그 순간,
단말마와 같은 이명이 짧막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죠? 어쩐지 머리가 아파옵니다.
아, 그제야 흐릿한 의식 너머로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그렇지. 오늘은 당신이 누구보다 아꼈던 이의.
...올리비아의 첫번째 기일이었죠.
그러니 당신은 그가 잠들어있는 납골당으로 향하는 길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이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문득, 버스는 인적이 드문 정류장에 정차합니다.
탑승구가 열리고, 올라타는 승객의 모습에...
당신은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 버스 위에 올라탄 사람은,

…1년 전 죽었던 올리비아였으니까요.
고즈넉한 빗소리가 귀를 먹먹히 울리는 텅 빈 버스 안,
죽었던 올리비아와 조우하게 된 재경, SAN 1/1d3.

기준치: | 40/20/8 |
굴림: | 2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성치 1 감소.
맞붙고, 멎습니다.
맞붙는 것은 허공 위로 겹쳐진 두 사람의 시선.
일순 멎는 것은 당신의 호흡.
그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때로 꿈보다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요.
그렇기에 지금껏 비현실적인 현실을 여러 차례 맞이해가며,
이토록 불친절하고 잔인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요. 비현실적인 현실이요.
올리비아는 분명 1년 전에 죽었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날, 돌이킬 수 없는 사고에 휘말려서요.
그래요. 나는 그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곁에 있어주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의 부재를 부정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러니 내 앞에 서있는 저 사람은, 올리비아가 아닌 그를 지나치게 닮은 사람일 겁니다.
꿈보다 비현실적인 현실의 나날 속에서도 실현될 수 없는 비현실이 있는 법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돌아올 수는 없잖아요...
혼란 속에 빠져있는 당신의 상태를 눈치챈 걸까요.
막 버스에 올라탄...올리비아를 닮은 이는,
당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이 앉아있는 좌석 옆에 앉습니다.

아, 저 웃는 얼굴. 저 목소리. 나를 바라보는 다정한 두 눈동자.
아무리 부정하고 잊으려 애를 써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웠고, 그리웠기에 나날이 새로운 처절함과 아픔을 느끼게 했었던 저 두 눈처럼요.
정차했던 버스는 오로지 두 사람만을 태운 채,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당신은 받아들이고 맙니다. 올리비아를 닮은 이는,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이 아닌 올리비아 그 자체라는 사실을요.

올리비아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당신과 눈을 마주합니다.


그건 잘은..모르겠네.
당신의 답변을 들은 올리비아는 그저…
군더더기 없는 애정과 슬픔이 가득 담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볼 뿐입니다.
덜컹.
다시 한 번 방지턱을 밟고 지나간 버스가 얕게 흔들립니다.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53 |
판정결과: | 실패 |
한 번 더...해볼까요?

기준치: | 45/22/9 |
굴림: | 4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얕은 진동 탓에 시야가 갈라짐과 동시에, 문득 운전석 쪽으로 시선이 꽂힙니다.
…이상합니다. 운전석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어야 할 버스 기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버스는 그저 운전사도 없이 홀로 비가 내리는 도로를 내달리고 있습니다.
SANc 0/1.

기준치: | 39/19/7 |
굴림: | 1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성치 감소 없음.
올리비아를 돌아보면, 그는 일절 놀란 기색이 없습니다.
오히려 평온해보이는 얼굴로,


..응.


네가 어떻게.. 지금 내 앞에 고스란히 존재하는 거지? (울먹였다)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선배를 다시 만나기 위해 선배 꿈에 들어왔어요. 선배가 가기로 한 곳까지 길을 잃지 않도록 함께 있어주려고.

..고마워.



도중에 길을 잃지 않도록, 선배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 제가 바래다 줄게요.
그 말을 끝으로 버스는 곧 첫번째 정류장에 정차합니다.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은 협소한 간이정류장 지붕 아래로 들어섭니다.
빗줄기는 여전히 이 세상을 침수시킬 것만 같이 맹렬합니다.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처리된 정류장 지붕 아래,
양 옆으로 담장 형식의 벽면이 기둥처럼 세워져있고,
그 중앙에 원목으로 만들어진 나무 벤치가 하나 놓여있습니다.
버스 그림이 새겨진 표지판 또한 눈에 띕니다.
벽면, 나무 벤치, 표지판 조사 가능

간략한 버스 그림이 새겨진 정류장 표지판입니다.
표지판 아래 버스 노선도가 붙어있습니다.
음, 평범한 노선도가 아니네요.
아니, 이를 노선도라고 칭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버스 노선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노선도 대신...
'색상에 따른 국화꽃의 꽃말'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색상에 따른 국화꽃의 꽃말]
흰색: 감사함, 진실함, 성실함
분홍색: 정조
노란색: 순정
보라색: 내 모든 것을 그대에게
....색: 당신을... 합니다.
맨 아래 적혀있는 국화꽃의 색상과, 색상별 의미는 칠이 벗겨져있어 읽을 수 없습니다.
관찰, 지능, 자료조사 판정이 가능합니다.

기준치: | 75/37/15 |
굴림: | 5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색...
자세히 살펴보니...붉은색입니다.
꽃말의 의미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요.

(벽면을 살핍니다.)
마치 담장을 연장시키는 정류장의 벽면에는 흰색 장미 무더기가 덩굴을 내리고 자리합니다.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83 |
판정결과: | 실패 |
장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올리비아가 당신의 곁으로 다가옵니다.
당신을 보곤 웃으며 담장의 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네요.
그의 손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보니...국화꽃 한 송이가 보입니다.
흰 색의 국화. 당신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흰 색 국화 꽃입니다.
흙 속에 뿌리를 내린채 한들한들 흔들리는 국화꽃은 물기를 머금은 탓에 아주 생생합니다.
국화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쏟아져내리는 빗소리를 가르고 올리비아가 말을 걸어옵니다.

빗줄기에 파묻힌 탓이었을까요.
그렇게 속삭이는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어쩐지 막연하고도 얕습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평범한 나무 벤치.
지붕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주는 탓에 젖은 부분 없이 바짝 말라있습니다.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벤치에 앉아 쉬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벤치에 앉으니, 어째 정류장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듯 합니다.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97 |
판정결과: | 대실패 |
크게 눈에 띄는 건 없습니다. 벽면 상단에 고정 된 버스 도착 안내 전광판 정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느 버스 정류장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전광판입니다.
전광판에는 글자가 흐르고 있지만, 약한 노이즈가 끼어있는 탓에 글자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글자를 읽어볼까요?

...의 이름을 호명할 때, 다음 버스가 도착합니다.
지능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3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문득 막연히 떠올립니다.
올리비아의 이름을 부르면 다음 버스가 도착하지 않을까? 하고요.
조금 실없지만...가능성은 있잖아요.

저기..올리비아?

왜요, 재경 선배?
왜, 였을까요.
나지막이 당신의 이름을 마주 부르는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어딘가 한구석,
차게 식은 빗물에 젖어 번지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바라보는...
한없이 가라앉은 것만 같은 올리비아의 두 눈동자에서 무엇을 읽어냈나요.
심리학 판정.

기준치: | 10/5/2 |
굴림: | 44 |
판정결과: | 실패 |
제대로 짐작가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지능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4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그러고보니, 올리비아의 입술 바깥으로 터져나온 '나'의 이름은 이번이 최초이지 않았던가요.
그는 버스에서 조우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으니까요.
무어라고 말을 건네기도 전에 장대비의 포화를 가르고 라이트가 번쩍입니다.
곧 버스 한 대가 정류장 앞에 정차합니다.
버스의 전면 유리창에 붙어있는 라벨에는 '1213번'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두 사람은 버스에 올라탑니다.
듣기 판정.

기준치: | 40/20/8 |
굴림: | 52 |
판정결과: | 실패 |
어쩐지 단말마와 같은 이명을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빗소리 탓에 명확한 사고가 서지는 않지만요.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올라타는 것과 동시에 버스는 천천히 빗길속을 뚫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버스는 첫 번째 버스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있습니다.
이 안에 존재하는 탑승객은 오로지 당신과 올리비아, 두 사람 뿐입니다.
운전석을 살피면 첫번째 버스와 마찬가지로 기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버스는 그저 운전 기사 없이 홀로 굴러갈 뿐입니다.
두 사람은 의자 두 개가 붙어있는 2인용 좌석에 착석합니다.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품에 안은 국화에서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

나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엄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었다. 우물거리는 발음으로 말 하나 하나를 읊조렸다.) 네가 없는 동안에.
..별 거 없었어.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도로 감았어. ...... 그냥 그렇게 지냈어.




(너의 쪽을 뚜렷하게 응시하곤) 올리비아..내가..지금 네 앞에서 아무런 거짓도 말할 수 없는걸 너도 알잖아.
확실히 해 두려는 거라면, 보고싶었어..정말로..

이 쪽에서도 한 번 더 말해도 괜찮죠? 나도 보고싶었어요, 많이.
짧은 대화를 이어나가던 와중,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오릅니다.
날짜를 특정할 수 없는 그 언젠가의 평범하고 행복했던 기억.
당신의 옆에는 올리비아가 자리하고,
우리는 조용하고도 한적한 버스에 앉아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습니다.
상기해낸 평화로움도 잠시, 당신은 갑작스러운 서늘함을 느끼게 됩니다.
글쎄, '서늘함'이라는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요.
두려움, 공포, 슬픔, 당황스러움.
모든 불안정한 감정이 한데 뭉쳐 숨통을 억세게 짓누르던 그 때.
빗길에 미끄러진 버스가 요동치듯 크게 흔들립니다.
무언가에 머리를 강하게 맞는 충격과 함께 일순 힘이 빠져나간 몸이 앞으로 쓰러집니다.
와락.
고꾸라지는 몸을 지탱하듯 누군가 나를 강한 힘으로 끌어안습니다.
아니, '누군가'라고 특정지을 필요도 없잖아요.
그야 지금 당신의 곁에 존재하는 사람은 올리비아 뿐인걸요.
올리비아입니다. 그가 억센 힘으로 당신을 끌어안았습니다.
어째서?
그런 의문을 던지기도 전,
쾅―!!
반대편 차선을 지나치던 트럭과 버스가 갑작스레 충돌합니다.
직후 들려오는 것은 커다란 굉음.
쇠가 굽어들고 절단되는 듯한 소름끼치는 금속음.
무언가 터지는 소리, 날아가는 소리,
어딘가에 들이박는듯한 충격.
온 몸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생생한 통증.
품에 안고 있던 국화꽃다발이 바닥을 나뒹굴고,
마치 눈송이같은 국화꽃잎은 시야를 긋고 흐드러집니다.
나를 꽉 끌어안은 올리비아의 체온은 어쩐지 전혀, 따듯하지가 않아서.
그게 또 어쩐지 너무나도 슬퍼서…….
괜찮느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올리비아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전에 시야가 수몰됩니다.
칠흑같은 어둠이 눈 앞에 쏟아집니다.
왜인지 생경하지 않은 순간입니다.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
듣기 판정.

기준치: | 40/20/8 |
굴림: | 58 |
판정결과: | 실패 |
삐―. 의식과 함께 낙하하는 머릿속에 이명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제와서 그런 이명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어지러운 의식을 잠재우듯 귓가에 익숙하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섞여들던 탓입니다.

괜찮아요...
…하고.
...
......
깜빡.
당신은 눈을 뜹니다.
제일 먼저 들려오는 것은 무겁게 낙수하는 물방울 소리.

...그리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품 안에 안겨있는 백색의 국화꽃다발입니다.
꽃다발은 아까 전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시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시들면 안 될텐데.
어쩐지 막연한 슬픔이 느껴집니다.
그야 오늘을 위해 준비한 꽃다발인걸요.

꼭 빗물에 익사할 것만 같이 무겁던 정신을 흔드는 것은...
잔잔하고도 담담한 올리비아의 목소리.
이곳은 버스 정류장인 것 같습니다.
꼭 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만 같이, 끊임없이 펼쳐진 도로 한가운데 마련된 간이 정류장이요.
어느 틈에 하차한 걸까요.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있습니다.
올리비아에게 기댄 채 잠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숨을 토했다.) 나는 괜찮아. 깨어 있을게.

그렇게 말하는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지쳐있는 것만 같다는…
그런 이유 모를 감상이 듭니다.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4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첫번째 정류장과 마찬가지로, 벽면 상단에 고정되어있는 버스 도착 안내 전광판이 보입니다.
역시나 노이즈가 끼어있는 탓에 글자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첫번째 정류장에서 보았던 전광판에 비해 노이즈가 덜합니다.
읽어볼까요?

인도자... ...의 이름을 호명할 때, 다음 버스가 도착합니다.
첫번째 정류장에서 올리비아의 이름을 호명한 직후 버스가 도착했던 것을 떠올립니다.
두 번째 정류장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능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2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버스 사고의 충격 탓이었을까요?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버스에 다시 올라타고 싶지는 않다는 충동이 듭니다.



무겁게 허공을 가르는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어째서 이만큼이나 빗물에 수몰될 듯 참담히 젖어있는지.
...올리비아가 당신의 이름을 호명하고 얼마 있지 않아 세 번째 버스가 저 멀리서 빗속을 헤치고 다가와 정차합니다.
버스는 지금까지 승차했던 버스와 달리 커다란 2층 버스입니다.
아, 실은 누가 부르든 상관 없었던 걸까요.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든,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르든 달리 상관이 없었던 겁니다.
두 사람 앞에 멈춰선 버스의 탑승구가 입을 벌립니다.
...타고 싶지 않아요.
타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그래서는 안될 것만 같다는 근원 모를 충동만이 내 안에 가득합니다.




우리가..저 버스에 오르지 않으면 안될까?

다 괜찮아요...응? 나 봐요. 같이 있어줄게요.
...하지만 그 이유 모를 낯선 충동은,
빗물보다도 잘게 흐드러져 떨어지는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집니다.
아까까지만해도 숨통을 조르고 익사시킬 듯 나를 쥐고 흔들었던 불안감마저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합니다.
그저 온 세상을 적시는 빗소리와 끝없는 안정감만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합니다...


듣기 판정.

기준치: | 40/20/8 |
굴림: | 7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삐―. 아까 전 들었던, 이제는 익숙해진 단말마와 같은 이명이 귓가를 울리고 사라집니다.
두 사람은 곧, 0928번 버스에 올라탑니다.
두 사람이 올라타는 것과 동시에 버스가 움직입니다.
차창 바깥으로 온통 습기뿐인 세계가 스쳐 지나갑니다.
버스는 지금까지의 버스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있으며, 기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안에 존재하는 탑승객은 그저 당신과 올리비아, 두 사람 뿐입니다.
버스 내부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이지만, 입구가 닫혀있습니다.
닫혀있는 입구의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는 것이 보입니다.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2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품에 안고 있던 국화가 일전보다 훨씬 더 생기를 잃은 것 같습니다.
갓 생명을 피워낸듯 하얗고 투명하던 꽃잎은, 이제는 그저 계절을 잃은 이름 모를 들꽃처럼 보여요.
단지 몇 송이의 국화만이 처량히 바래진 꽃잎의 색을 발할 뿐입니다.



문득 올리비아를 바라보니, 그가 어쩐지 멍해보이고...
지친 듯. 혹은 침체 된 듯 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걸 눈치챕니다.
뭐랄까, 어딘가 나사가 풀린 것 같습니다.
괜찮은 걸까요. 잠시 생각하다 버스의 내부로 눈을 돌립니다.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74 |
판정결과: | 실패 |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발에 무언가 채입니다.
좌석 바닥에 떨어져있는 책이 한 권.
책이라기보다는 얇은 책자에 가까워보입니다.
푸른 색의 표지에는 아기자기한 회전목마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습니다.
놀이공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화려하고도 쓸쓸한 푸른 대낮의 회전목마네요.
제목은 'merry go round' …메리 고 라운드.
회전목마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읽어볼까요?

merry go round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하며, 막 망자를 위한 길로 들어서기 직전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흔히 인생의 주마등과 마주하곤 한다.
지금껏 살아왔던 인생이 눈 앞에서 한 차례 영화처럼 펼쳐지는 현상을 주마등 현상이라고 일컫는다.
죽음의 끝에 당도한 산 자여, 그대의 삶이 적어내려간 필름의 길이를 돌아본 적이 있는가.
순간,
강한 현기증과 함께, 당신은 정신을 잃습니다.
빛도 한줄기 들지 않는 맨 밑바닥의 어둠 속에서, 당신은 환각을 마주합니다.
환각 속에 삶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가장 슬펐던 순간이,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라 여겼던 반짝이던 삶의 조각과,
어느 순간 내 삶에 끼어들어 뿌리를 내리고 침범한 너.
올리비아와의 첫만남.
…빼놓을 수 없는 여러 기억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었던 기억,
처음으로 그가 당신의 앞에서 눈물을 터뜨렸던 기억,
고조되는 행복감에 웃어버렸던 순간.
한동안 빠른 속도로 영상이 스쳐 지나가고.
잠시간 필름이 뚝 끊기며 말간 어둠이 지속됩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다시금 빛처럼 터져나오는 영상이 하나.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당신과 올리비아,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차창 바깥으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없이 다정하며, 또 그와 동시에, 애정이 가득한.
그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체온이 따스한 손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고즈넉한 빗소리의 향연마저 서로간의 애정에 담뿍 물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쾅―!!
반대편 차선을 지나치던 트럭과 버스가 갑작스레 충돌합니다.
직후 들려오는 것은 커다란 굉음.
쇠가 굽어들고 절단되는 듯한 소름끼치는 금속음.
무언가 터지는 소리, 날아가는 소리,
어딘가에 들이박는듯한 충격.
온 몸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생생한 통증.
쉼없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어두운 화면 사이로,
그런 당신을 한 점 망설임 없이 끌어안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아니, '누군가'라고 특정지을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의 곁에 사시사철 피어나는 국화처럼 존재하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늘 당신을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으며,
당신과의 정을 어느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오고 아껴온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야...올리비아가 아닙니까.
올리비아 셔먼입니다.
올리비아가 억센 힘으로 오재경, 당신을 끌어안았습니다.
암전하는 버스의 내부를 어둡게 띄우며 필름이 또 한 차례 뚝 끊겨나갑니다.
떠오르는 영상의 날짜는… 1년 전의 오늘입니다.
아, 그제야 지금까지 서리가 내린듯 희뿌옅기만 하던 기억 하나가 마치 퍼즐조각처럼 맞달라 붙습니다.
1년 전의 사고가 떠오릅니다.
1년 전, 돌이킬 수 없는 사고의 현장에 존재하던 것은 올리비아만이 아니었습니다.
올리비아와 재경, 두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나'를 제외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던 그 참담한 사고의 현장에서,
올리비아는 당신을 끌어안고 죽었습니다.
오로지 나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켜서요.
이건… 주마등인가요?
그래요. 이건 주마등입니다.
인생의 주마등 속에서 사고의 진상을 목격한 당신, SANc 1d2/1d4.

기준치: | 39/19/7 |
굴림: | 7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이성치 -2.
일순 강한 충격과 함께 주마등이 돌아가던 공간이 산산이 부숴져내립니다.
듣기 판정.

기준치: | 40/20/8 |
굴림: | 85 |
판정결과: | 실패 |
삐ㅡㅡ...이명입니다.
여태껏 들어온.
아니, 기계음 같기도 합니다.
꼭 말단부위부터 심장까지 강한 전기가 흘렀다 사라지는 것만 같은 감각.
이윽고 수몰됩니다.
그 조각들과, 끊임없이 퍼붓는 빗소리에 한데 뒤엉켜있던 환각들이 수몰됩니다.
...
귀를 먹먹히 침수시키는 낙수음.
당신은 흔들리는 버스 좌석에 앉은 채 눈을 떠올립니다.
기억 났습니다. 떠올렸습니다.
1년 전의 그 날, 올리비아는 나를 끌어안고 대신 죽었던 겁니다.
고개를 돌리면 올리비아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채 곤히 잠들어있습니다.

덜컹.
버스가 방지턱을 밟고 흔들립니다.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그에 맞춰, 짤그랑.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미약한 금속음이 들려옵니다.
내려다보자, 회전목마 키링이 달려있는 작은 열쇠를 발견합니다.

지능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94 |
판정결과: | 실패 |
어디의 문을 여는 열쇠일까요?
이 버스에 잠긴 곳이 한 곳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럴지도 모릅니다. 한 번 열어볼까요?

금속이 맞물려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버스 2층이 개방됩니다.
버스의 2층으로 들어서면, 그 장소는 이상하게도 단촐한 방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차창에서,
물기를 머금은 탁한 빛이 터져나와 내부를 은은히 비추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책상과 책장, 그리고 침대 하나가 놓여있네요.
책상, 책장, 침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꼭 병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병실용 침대입니다.
다가서면 커튼이 반쯤 쳐져있습니다.
커튼 위로 핀이 꽂힌 명찰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찰에는...
...
오재경.
문득 당신은 뼈를 치고 사라지는 기시감에 휩싸입니다.
조금 급한 손길로 커튼을 완전히 걷어내면,
드러나는 것은 쓸쓸하기 짝이 없는 병실의 매트리스 침대.
침대 주변으로 즐비한 온갖 의료 장치들…
그 사이에 푸른색 담요를 덮고 누워있는 사람은 입가에 산소마스크를 뒤집어 쓴 채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당신은 형용할 수 없었던 기시감의 정체와 마주합니다.
당신이잖아요.
병상에 누워 끊임없이 즐비한 갖가지 의료 기계들 틈 사이에서,
산소 호흡기를 뒤집어 쓴 채 실낱같은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은…
오재경, 당신입니다.
듣기 판정.

기준치: | 40/20/8 |
굴림: | 19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삐―. 문득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익숙한 기계음이 터져나옵니다.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59 |
판정결과: | 실패 |
병상 옆에는 심전도기록장치가 하나 자리합니다.
기록장치의 모니터 위로 마치 미약한 파도같은 당신의 심전도 곡선이 출력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마치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연약하고도 미약한 곡선이요.
지금까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던 수많은 이명, 아니.
심전도기록장치의 기계음을 떠올립니다. 이제야 확신합니다.
당신을 감싸안고 죽어버린 올리비아의 희생이 무색하게,
당신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버스는 무언가요.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SANc 1d2/1d4.

기준치: | 37/18/7 |
굴림: | 82 |
판정결과: | 실패 |
이성치 -2.
침대는 충분히 살폈습니다, 아니. 더는 살피고 싶지 않습니다.

(책상을 살펴봅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책상 위에는,
그 흔한 필기도구도, 책도, 사용감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먼지조차 한터럭 쌓여있지 않네요.
말끔하다 못해 쓸쓸해 보이는 책상 한가운데 반으로 접혀 있는 쪽지만을 한 장 발견합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 죽음이 머지 않은 영혼의 길을 인도하는 사자는.
생전 그 사람이 가장 사랑했던 자의 얼굴로 나타나 여로를 안내한다.
...특별한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 ....(책장을 마저 살핍니다.)
책장에는 책이 한가득 꽂혀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읽을 수 없는 것들 뿐입니다.
검은 색의 책등만이 마치 밤하늘처럼 빼곡이 즐비합니다.
자료조사, 또는 관찰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5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책들 사이에 꽂혀있는 쪽지를 한 장 발견합니다.
죽음의 이름은 곧 다음 생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기 전까지의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
그 안식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사자는 산 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세 번의 호명 끝에 산 자는 비로소 망자가 된다.
여태 올리비아가 당신의 이름을 호명했던 것은...
올리비아의 호명이 있고 나서 버스가 도착했던 것은...
...
믿을 수 없는 현실의 연속입니다.
아니, 이제 이건 현실이 아니겠지요.
이 버스는, 스스로가 수몰되어가는 버스.
'영원한 안식'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 있는 것은.
오재경, 당신입니다.
... ...
어쩐지 몸이 강하게 흔들리는 것만 같은 느낌에 눈을 감았다 떠올리면,
흐릿하고 침침한 시야 너머로 희기만 한 천장이 들어옵니다.
삐. 삐. 삐.
벨이 터지는 소리,
장치에서 터져나오는 다급한 기계음 소리,
위급한 환자의 위치를 알리는 병원의 방송 소리,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뭉개지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
그리고 당신은, 다시 눈을 감습니다.
...
쏴아아.
고요하고 적막하게 수몰하는 세상을 울리는 빗소리.
낙수하는 빗물은 봄의 끝물에 삶을 모두 피워내고 낙화하는 벚꽃을 닮았습니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길에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정류장입니다.
품에 안고 있는 국화꽃은 이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시들어 있습니다.

귓가에 내려앉는 다정한 목소리.
올리비아에게 기댄 채 잠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고개를 들어올리면 아주 자연스럽게도,
정류장의 상단에 자리하고있는 버스 도착 안내 전광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까지의 전광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의 노이즈도 끼어있지 않다는 것.
이제는 온전히 모든 글자들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
인도자가 인도를 받을 자의 이름을 호명할 때, 마지막 버스가 도착합니다.
아, 그래요.
그랬던 겁니다. 누가 부르든 상관 없던 게 아니었던 겁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든,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르든 달리 상관이 없던 게 아니었던 거예요.
당신은 지금껏 올리비아가 각 정류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호명했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러고보면, 꼭 올리비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뒤에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던가요.
그야 당연하잖아요. 저 메시지에 따르면…
인도자는 올리비아. 인도를 받을 자는, 망자의 길에 들어선 자.
죽음의 여로에서 가장 먼저 버스에 올라타있던 자. 바로 당신입니다.
그렇지만 왜일까요. 어찌된 일인지 올리비아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제, 마지막일텐데. 어째서.
당신은 첫 번째 버스에서 조우한 직후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올리비아의 표정을 마주합니다
그는… 기뻐보입니다.
동시에 슬퍼보입니다.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펼친 우산을 당신에게로 기울입니다.
그의 어깨가 젖어듭니다. 그제야 그가 입고있는 옷차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까만, 정장이네요. 꼭, 세상이 말하는 인도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산을 당신에게로 기울인 채 처연히 떨어지는 비를 맞던 올리비아는 나지막이 입술을 엽니다.
눈물같은 목소리가 허공을 가릅니다.

그렇게 속삭인 올리비아는 문득 당신에게로 손을 내밉니다.
사방은 어느새 컴컴해져있습니다.

도중에 길을 잃지 않도록, 선배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 제가 바래다 주겠다고 했었죠.
같이 건너편 정류장으로 넘어가요. 선배한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요.
...자요, ( 내민 손에 턱짓하곤 )

(천천히 제 손을 포갰다. 꽉 쥐었다.)
올리비아는, 잡은 손을 이끌어 천천히 걷습니다.
두 사람은 반대편 정류장으로 이동합니다.
발끝을 적시는 빗물은 기실 뜨거운지도, 차가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잖아요.
내가 지금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할 존재는 그저 올리비아 단 한 사람 뿐인걸요.

그러니까 1년 전 오늘, 선배와 제가 함께 타고 있던 버스가 빗길에 미끄러진 트럭과 추돌하는 사고가 있었어요. 그 사고에서 전 죽게 된 거고. 선배는 바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1년 째 혼수상태에 빠져있는거죠.


나는...선배가 죽더라도 편안했으면 했으니까...선배를 안전한 안식으로 이끌려고 신적인 존재랑 계약을 했어요. 막상 얘기로는 우리가 되게 자주 하던 소린데 실제로 해보니까 묘하더라고요~...
그래서...덕분이지, 선배를 안식으로 인도할 힘과 공간이 생겼어요. 그 공간이 지금까지의 버스들이고...내가 정류장에서 한 번씩 선배 이름을 부른 것도 선배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거였고.
그렇지만, 잘 됐어요.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요. 중간에 우리를 도운 신이 있어요. 저는 선배를 다시 삶으로 돌려보낼 수 있어요.
선배가 들고 계신 국화 말인데, 절대 잃어버리지 마요, 선배의 생명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두 사람은 건너편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모든 진상을 듣게 된 당신은 숨이 막혀옵니다.
억만겁의 슬픔 탓일까요, 아니면…
네 목소리가 떨렸기 때문일까요.
SANc 1/1d3.

기준치: | 35/17/7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이성치 -2.
아직도 뒤를 돌아있는 올리비아의 어깨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는 전광판이 보입니다.
전광판의 메시지는 우리가 원래 앉아있던 반대편 정류장의 전광판 메시지와 그 내용이 상이합니다.
삶으로의 귀환. 삶으로 인도받을 자가 인도자의 이름을 부르면, 삶으로 향하는 생환 버스가 도착합니다.
그 뜻 대로라면...
이제는 반대입니다.
이제는 반대로, 당신이 올리비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이내, 올리비아가 고개를 돌려 당신을 마주합니다.

선배는 다시 살게 되면, 다시는 이런 일 없이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진짜로 잘 됐, ( 말을 하는데, 쉽사리 단어를 뱉을 수가 없어서. ) ...잘 된 거죠?
(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네게 한 발짝 다가간다. ) 선배,
나는...나, 부, 분명히...선배가...살길 바래서...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서...그게...그, 그러니까,
( 무너지듯 네 옷자락을 붙잡고는 쥐어짜내는 것처럼, 애써 말을 이었다. ) 헤어지기 싫어요...



나는..네가 무얼 해도..항상..널..아끼고..또 그립고, 으으..(네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리고) 나도..나도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저기.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안될까? 네가 나를 원하고, 내가 너를 원하는데, 우리 둘이, 이 곳에서 억 겁의 시간을 보내면 안될까? 그저, 그냥그럴 순 없는 걸까?(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토했다. 안은 두 팔에 더욱이 힘줬다.)(네 생각을 묻는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내가..너랑 죽어줄게.
삶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나에게 필요 없습니다.
그게 오재경, 당신이 내린 결론이며 판단입니다.
...
끝까지 올리비아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는 당신을 바라보는 나의 사랑. 그의 표정은...
슬픔. 한 없는 슬픔과 동시에...
무언가의 안도감에 의해, 진심으로 편안하고 행복해보이기도 하는.
그리고 그 감정의 혼돈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애정의 말로.
올리비아는 당신을 더 꾸욱 끌어안습니다.
삶으로 돌아갈 생환 버스의 라이트가 켜지는 일은 없습니다.
차가 우리 둘의 앞에 나타나는 일도 없어요.
나는 버스가 필요없고,
사랑하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죠.
우리가 함께하지 않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영원히 이 수몰되는 세계에 갇혀 영생을 걷게 될지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래서, 온 몸이 닳아 없어질지라도 상관 없습니다.
오재경의 곁에 올리비아 셔먼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해요, 사랑해요, 선배...
재경 선배, 사랑해요.
같이 마지막 버스를 타러 가주세요...나랑.
나랑, 함께 수몰해주세요!
함께. 올리비아.
마지막 세 번째 입니다.
세 번째로 내 이름을 호명한.
나의 인도자.
나의 구원.
나의 올리비아가 웃습니다.
한 편으론 고통스럽지만, 한 편으론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다양한 감정이 섞여 젖은 눈동자로, 당신을 향해 웃습니다.
우리는 다시 반대편 정류장으로 되돌아갑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올라탑니다.
툭.
품에서 떨어진 국화꽃다발이 빗물 속을 나뒹굽니다.
아니, 이제 더 이상 국화 꽃이라고 부를 수 없겠지요…….
삐―.
그와 동시에 이젠 익숙해진 기계음이 귀를 울립니다.
...
END2. 이곳은 내 사랑이 수몰할 세상.
오재경, 올리비아 셔먼 로스트